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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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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역을 통해 KTX(고속철도)를 이용하는 승객이 2010년 12월 경전선 개통이후 급감해 109년 전통의 밀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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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과 밀양의 의병 항쟁 학술회의' 밀양문화원 주최
  군관민 합세 대항 전국의 의병 창의 계기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의 북상의 중요 통로이었던 밀양에서는 이에 대항하는 의병들과 치열한 항쟁이 벌어졌다. 특히 박진 부사가 이끄는 밀양 의병은 삼랑진 작원관에서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이 이끄는 왜군과 군관민이 합동, 치열한 대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그들의 우회전에 말려 실패했다. 그러나 작원관 전투는 지방 의병 창의의 결정적 계기를 부여했을 뿐만아니라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 북상을 저지시키는 등 그 역사 의미는 실로 크다"
임진왜란 당시 밀양의 의병항쟁을 재조명하기 위해 밀양문화원(원장 손기현)이 25일 시청 강당에서 3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마련한 학술회의에서는 관련 학자들이 출연, 임란당시 밀양지역을 비롯 창녕․진주 등지에서 창의한 의병활동과 당시 사회적 배경 등이 제시되어 관심을 모았다.
이날 학술회의는 주제발표와 종합토론순으로 진행됐다. 주제발표내용을 취사선택해 게재한다.

◆정진영(동명정보대) 교수(경상도 임란의병의 활동배경과 의의) = 임란 당시 왜병들의 북상에 있어 중요 통로였던 경상도의 의병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창의, 다른 지방의 창의를 촉발시키는 계기부여를 했다.
남해상에서 아군의 제해권 장악을 위한 수군의 배후기지를 제공해 주었고, 낙동강 방어선과 진주성 사수에 총력을 기울여 왜적의 호남 진입을 차단하고 호남지역 군수․민수물자의 수송과 보급을 원활하도록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역단위의 크고 작은 의병부대들이 그 지역에서 왜적의 기습과 야습을 유인하고 낙동강 사수에 주력해 북상한 왜군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주력 부대의 남하를 유도하고 관군이 체제를 정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했다.
경상도 의병의 이같은 활동은 재지양반층의 인적․물적의 토대위에서 가능했지만 당시 경상도 초유사였던 학봉 김성일의 역할은 크게 눈여겨 볼만하다.
경상도 의병의 큰 공은 왜적의 북상통로를 차단, 북상을 지연시키고 특히,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 수군의 활동을 가능토록한 부분도 함께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김강식(울산대) 교수(임진왜란 시기 밀양인의 의병항쟁과 의미) = 삼랑진 작원관 전투는 일본군에 대항 밀양부사 박진을 비롯 밀양지역의 군관민이 하나되어 맞선 전투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이후 밀양지역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밀양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제1진 격로에 위치,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군이 진격한 곳으로 부사 박진이하 군관민이 대항했으나 일본군의 우회전술에 말려 점령당했다.
밀양이 거군적으로 일본군에 대항해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지역의 재지사족들이 향토와 국가 수호에 앞장섰고 이것이 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밀양지역의 의병 항쟁은 피난처이었던 형제골을 거점으로 하여 산내면 삼락정 대암을 비롯 지역 요충을 이용, 게릴라전법을 구사, 곳곳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는 철저한 전술과 전략 준비, 재지사족의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의병의 창의에는 향토수호의식이 전제되었고 특히 밀양 손씨, 여주 이씨 등 밀양의 재지사족 가문들이 주도했다.
박진과 김유부․이경홍․손기양 등은 작원관과 석골사 등지에서 창의한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사명당은 의승장으로 평양성 탈환 2차 전투에서 승리, 대일본 항쟁의 도화선을 마련한 인물이다.

◆변광석(울산대) 교수(임진왜란 시기 밀양출신 세력의 의병활동) = 임란당시 밀양 일원의 주요 전적지도는 '작원관'과 임천의 '광탄', 산내 용전의 '대암', 산내 원서리의 '석동' 등으로 박진과 손기양․이계승 등이 이곳에서 의병을 창기, 대항하던 곳이다. 밀양무안출신인 노개방은 동래에서 송상현 부사와 함께 대항하다 순절했고, 박수춘․김태허․조이복․박종민 등은 곽재우와 함께 창녕 화왕산성을 고수했다.
특히 부사 박진은 밀양군 관문이자 영남의 제 요충지인 작원관에서 수병(手兵) 300여 명을 거느리고 대항하다 실패했으나 군관민이 연합을 구성,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끝까지 대항, 북진을 지연시키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특히 그 당시 사명당의 평양성 1차 전투에서의 승리는 그 당시 전쟁의 국면을 전환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임란 당시 밀양지역 의병활동의 주도세력은 대개 지역사회의 사족양반층으로, 사회경제적 기반과 학문적․인적 유대관계 하에서 조직화될 수 있었다. 여기서 나라에서 관군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의병들에게 부역과 신역을 면제해 주거나 군량을 지급해 하층민 모병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장동표(밀양대) 교수(임진왜란 전후 밀양 재지사족의 동향) = 임란 이전 밀양의 재지사족은 비교적 빠르게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향촌지배기구의 설립과 운영을 통해 성장했다. 임란후에는 전쟁으로 흐트러졌던 질서는 재편되면서 점차 향촌사회 주도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밀양의 재지사족은 고려 때 토성 세력이었던 본부의 손․박․변․김․조(趙)․변․양씨와 수산 일대 서․노․변․박씨 등이 조선 건국이후 사족과 이족으로 분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됐다.
토성 가운데서도 밀양 박씨와 밀양 손씨 가문이 고려 중기이후 활발한 상경종사를 통해 강력한 재지사족적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세력 기반 구축과 결집을 위해 향사당 기능을 강화하고 서원 건립에 나서는 등 향촌지배기구 설립에 나서게 된다.
김종직은 1482년 '밀양향사당의 재기'를 지어 향사당 운영에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16세기 중엽에는 밀양박씨와 손씨가 주도했다. 임란이후에는 손기양․박수춘․안신 등이 중심이 되어 향안 중수가 이뤄졌는데 향원으로의 입록 기준은 엄격했다.
임란 후 재지사족들은 예림서원의 위상 정립과(손기양), 예림 이전(이이정), 향교 중수, 그리고 전쟁으로 소실된 영남루 중수는 임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재지사족들이 참여했음은 눈여겨 볼만하다. <신성식 기자>


[밀양시민신문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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